마지막 인사
( 東京喰種 - 有馬 貴将×千夏世)
-12월 27일. 앞으로 5일.
치카세 쥰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12월 늦겨울의 찬 공기가 폐부를 가차없이 쑤시고 들어왔다. 부은 눈을 꾹꾹 누르던 쥰은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친오빠인 카이토 쪽이다.
"으응."
카이토는 구태여 무어라 묻거나, 말하지 않았다. 다행이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도로 거실로 내려갈 뿐이었다. 돌아가는 형제의 뒷모습을 본 쥰은 천천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간밤에 난방을 충분히 했음에도, 식어버린 방은 차가웠다. 맨발로 그 찬 기운을 고스란히 밟으며, 소녀는 창 밖을 살핀다. 지난 몇 일 사이에 눈이 제법 많이 내렸다. 창틀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눈. 그를 닮은 눈.
미쳐 버릴 것 같다. 쥰은 솟구치는 눈물을 닦아내며 주저앉았다.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오빠. 오빠. 애처롭게 부르는 소리에 카이토가 급히 뛰어 올라오는 것이 들린다.
-12월 17일. 열흘 전.
"역시 오빠는 별의 정령이에요?"
종종 그에게 농담 삼아 묻곤했던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머리칼도, 심지어 속눈썹의 깊은 곳 까지도 온통 하얗게 물든 아리마를 바라보고 있자면. 쥰은 꼭 별에서 온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번에도 역시, 잠시 낮잠을 청하려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묻는다.
"쥰은 별을 좋아해?"
"응. 좋아해요. 아름답잖아요."
그렇구나. 보기 드물게 그가 웃는다. 세상에서 가장 상냥하고 자상한 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쥰은 한껏 수줍어졌다. 잉. 하고 작게 앙탈을 부리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자, 아리마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 말없이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별보다는 눈일까."
"눈?"
"하늘에서 내리는 눈. 별로 대단하진 않지만... 종종 쓸데없이 묵직하게 쌓이곤 하지."
아리마가 작게 하품을 하고 느긋하게 눈을 깜빡였다. 쥰은 그의 행동을 하나하나 눈에 담더니,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부터가 대단하잖아요. 소복하게 쌓인 눈길을 밟고 지나가면 기분도 좋아요. 조금 춥지만..."
"대단하지 않다고 말한 게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거야?"
"네."
재미있네. 아리마가 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쥰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릴 때, 눈은 별이 흘린 눈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겨울 하늘은 너무 추우니까. 별님이 울어도 금방 얼어버리는 거에요. 근데 그게 왜 그렇게 슬프게 느껴졌는지. 큰오빠 왈, 하루는 큰 마음 먹고 눈밭에서 뛰어 놀라고 데리고 나갔더니. '별님이 불쌍해.' 하고 울더래요."
"귀여운 때였네. 몇 살?"
"...다섯 살이요..."
말하고 나니까 엄청 부끄럽네요. 쥰이 얼굴을 가리고 우는 소리를 내었다.
"어릴 적 이야기잖아. 누구나 그런 환상 하나씩은 가지고 자라니까."
"그럼 오빠는 있었나요? 어릴 적의 환상 같은 거..."
아리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환상이라.
"글쎄. 흔한 것들일까...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해서 그 마저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지만."
"예를 들면요?"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오면 좋겠다. 같은 것들."
"로맨틱해요."
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산타클로스보다는 나은가?"
아리마가 다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열흘도 안 남았네요. 크리스마스."
응. 아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것이 함께 맞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일 것이었다.
"...괜찮으면, 그 날은 제대로 데이트 하자."
"정말요? 이래놓고 또 바쁘다고 미루면..."
"그렇게 되면 오쇼가츠* (お正月, 신정.) 에는 꼭..."
"오빠!"
못됐어 정말. 작은 손이 찰싹, 하고 단단한 어깨를 때렸다. 딱히 아프지는 않았지만 아리마는 머쓱하게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미안. 그날도 구울은 쉴 거라고 믿을게."
-12월 18일. 9일 전.
크리스마스 까지는 일주일이 남았다. 그렇다면 그의 생일까지는 이틀이 남은 셈이었다. 쥰은 달력의 20일과 25일에 붉은 동그라미를 쳤다. 물론 어느 하나 확정된 것은 없었지만, 표시를 하는 것으로 일종의 기원을 하는 셈이었다.
'뭘 좋아 할까...? 큰 선물은 되려 부담스러워 하겠지.'
쥰은 컴퓨터 앞에 앉아 한참 웹 사이트의 스크롤을 내렸다. 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추천해달라는 부모, 친구의 생일에 무얼하면 좋을 지 묻는 사람. 물론 개중에는 연인의 생일이나 두 사람의 기념일 선물을 찾는 사람도 있었다.
'완전히 나잖아.'
푸훗. 쥰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이 사는 모습은 대부분 비슷하구나.
[넥타이는 어떨까요?]
문득 아버지의 생일 선물을 찾는 10대 소년 (질문자 프로필에 의하면 그렇다.) 에게 달린 답변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학생의 지갑사정. 선물 받는 사람의 사회적인 입지 따위를 생각하면. 가벼운 의류가 적절하다는 것이 의견이었다.
"넥타이..."
쥰은 문득 그의 집에서 목도했던. 검은 바탕에 거미줄과 희고 화려한 나비가 그려진 끔찍한 넥타이를 떠올려냈다.
"이걸 정말 매고 다닌다구요?!"
"응. 문제 있어?"
더욱 놀라운 것은 시큰둥한 그의 반응이었다. 아리마는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내리며 뒤도 안 돌아보고 대답했다.
"...엄청나게 있어요! 상위 수사관중에서도 최고계급인 특등 수사관이잖아요. 게다가 국내 (局内) 에서 제일가는 인력이 이런 걸 하고 다닌다니...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히라코 씨도 아무 말씀을 안하셨던 거에요?"
"응."
내가 못 살아. 정말. 쥰은 초연한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상대는 아버지가 아닌데다, 업무 중에는 도심을 누비며 무기를 휘두르는 공무원이었지만. 정장을 빼입는 월급쟁이라는 사실 만큼은 동일했다.
''무난하고 괜찮은 무늬의 넥타이' 로 하자.'
쥰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창을 닫았다.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무슨 일이에요 오빠?"
발신인을 확인한 쥰이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돌아온 답은 참담했다.
"...미안 쥰, 큰 작전이 생겼어. 내일 당장 나가게 될 텐데. 끝나도 이틀에서 사흘 정도는 주욱 바쁠 것 같아."
'큰 작전' 이라 함은, 짧게는 반나절에서. 길게는 일주일 까지였다. 모처럼 기대에 부푼 마음이 뻥 소리를 내며 터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에요. 대신 정월에는 꼭 같이 있어요...!"
"그래. 또 연락 할게."
휴대폰을 내려놓은 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또 날 지난 선물을 건네게 생겼는 걸.
일단은 사 놓기라도 하자. 쥰은 목도리를 단단히 둘러맨 채 거리로 나섰다.
-12월 20일 오후. 일주일 전.
19일 저녁에 작전에 나선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23구의 수용소에 큰 공습이 있었다는 뉴스가 그날 오후부터 새벽시간 내내 속보로 돌았다.
"어제 오후 경 구울 수용소를 습격한 세력의 진압이 완료되어..."
왠지 손 끝이 찼다. 쥰은 끓여서 덥힌 우유를 잔에 따르며 TV로 시선을 돌렸다. 생일인 걸. 설마 그런 운명의 장난이 일어나기야 하겠어. 분명 늘 그랬듯 무사히 돌아와서 느긋한 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다.
"또한 준특등 수사관 '사사키 하이세' 가 소장과 특등 수사관 한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당국에서는 용의자를 '특별 수배범' 으로 지정하여..."
사망한 소장. 그리고 특등 수사관.
아리마였다.
잔이 깨지고 음료가 바닥에 흘렀다.
-12월 25일. 이틀 전.
장례가 끝났다. 쥰은 시신조차 확인 할 수 없었다. 제 몸 조차 가누기 힘들만큼 크게 충격을 받아. 영결식이 끝나고 나서야 간신히 그의 무덤을 찾았기 때문이다.
새로 세워진 묘비는 틀림없이 아리마의 것이었다.
"...크리스마스잖아요."
위험한 곳에서 가장 앞서 싸우던 사람이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마음과 달리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가득했다. 쥰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가장 가까이 있었을 히라코 조차 수배범으로 쫓기게 된 신세였다.
그의 마지막에 대해 알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녀는 비틀대는 걸음걸이로 돌아섰다.
-12월 31일. 하루 전.
그의 죽음 이후 11일이었다. 이젠 집 밖을 나서 걷는 것 조차 힘들었다. 잘 포장된 넥타이는 주인을 만나지도 못한 채 방 한 구석에서 근 2주치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겨울에 태어나. 34년 후 같은 날에 겨울로 돌아간 사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날에 죽음을 애도해야 했던 사람.
"잔인하네요..."
쥰은 심장부터 말라 비틀어지는 듯 했다. 요 며칠간, 마치 과거에 그러했듯이 방 안에 누워,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방해해서 미안. 들어가도 돼겠니?"
문득 작게 열린 문틈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토였다.
"아니. 그냥 혼자 있고 싶어."
"...그럼 이거 가져 가. 방금 온 우편인데, 네 앞으로 왔더라."
눈치없기는. 분명 광고겠지. 쥰은 이불을 뒤집어 썼다.
"...키쇼 군이 보냈어."
카이토는 문틈으로 봉투를 밀어넣고 층계를 내려갔다. 쥰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만닌 듯 처절하게 침대에서 튕겨져 나왔다. 볼펜으로 눌러 쓴 단정한 글씨체는 익히 봐 온 것이었다.
[쥰에게.
큰 작전에 나가기 전에는 늘 유서를 써야 한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지. 그리고 나는 늘 백지를 내곤 했어. 전할 사람도. 남길 말도 특별히 떠오르지 않아서.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많이 다르구나. 크리스마스, 아니면 정월이라도 함께 보내자고 했었는데. 안타깝지만 나는 죽음을 피하지 못할 듯 싶어.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야기는 길고. 혹여 네가 위험해 질까 두려움이 앞선다.
결국 너에게 거짓말을 한 꼴이 되었어. 마지막에는 행복한 기억을 남겨 주어야 하는데. 부디 세상에서 가장 못난 남자를 용서 해주렴. 그리고, 몇 가지 부탁을 남길게.
첫째. 건강해야 해.
시름에 빠지지 말라는 이기적인 말은 하지 않겠지만. 가능한 빨리 딛고 일어나 주었으면 해. 약도 빼지 말고 잘 먹고, 병원도 잊지 않고 다녀.
둘째. 행복해 줘.
실로 우습고 뻔한 부탁이지만. 가장 큰 부탁이기도 해. 더 평범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도 좋고. 혼자여도 좋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줘. 이건 우습지만 '내 몫까지' 도 포함되는 부분이야.
마지막으로.
고맙구나. 쥰. 별의 정령은 내가 아니라 너였단다. 너를 보고 있자면, 조금 더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을 갖기도 하고. 구원받는 듯 한 기분이 들었어. 꼭 사막에서 별을 보고 길을 찾듯이. 자주 말 해주지 못해 미안해. 정말 많이. 사랑해.
-아리마 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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