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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2017년 5월호

꿈을 꾸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 라피스 라즐리 )

 

꿈을 꾸었다.

 

 

( 정령왕엘퀴네스 - 라피스+이사벨라 )

 

 

 

 

 

 

 

 

 

 

 

거울이 깨짐과 동시에 파괴된 벽면 밖으로 넓은 공간이 드러났고, 바닥에서 거대한 기둥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쿠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솟아나는 기둥들에 따라 그들이 서 있던 바닥도 크게 꿈틀거리더니, 변형되기 시작했다. 당황하는 동료들을 둘러보는 이사벨라의 눈에 흥미로운 빛이 감돌았다. 던전에서 마주한 마계의 생물들로 보아, 이 던전을 만든 녀석은 실력이 상당한 마족일 거라고 확신했지만 이중 함정까지 만들어놓을 줄이야. 한번 만나보고 싶은걸. 거울의 그림자 때문에 서로 떨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의 간격 사이로 솟아오른 벽면의 뒤로 다른 동료들의 모습이 삼켜지듯 사라졌다. 당황한 얼굴로 제 쪽으로 손을 뻗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이 순식간에 벽 뒤로 사라졌다.

요란하게 움직이던 바닥의 움직임이 멈추고 나서야 주변이 고요해졌다. 거울에 둘러싸여 있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오직 하나로만 나 있는 길 너머는 그저 어둠에 묻혀있었다. 시력이 월등히 좋은 그녀에게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도 어두운 모양이었다. 혼자 덩그러니 서 있던 이사벨라는 느리게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두운 길이 슬슬 지겹다고 느껴질 때쯤, 이사벨라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익숙하지만, 굉장히 오래된 것 같은 이 기척은. 드물게 표정을 굳힌 그녀는 기척이 느껴지는 제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분명히 던전의 내부로 들어왔는데, 야명주의 빛에 의지해서 걷고 있던 어두운 길이 걷히고,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귓가를 시끄럽게 두드렸다. 인간들의 마을. 마을 밖의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거리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타오르는 노을 속에서 저녁 시간을 알리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어린아이들을 제집으로 불러들이고 잠시 쉬어갈 용병들과 모험가들은 몸을 누일 여관을 찾느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금은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몇백 년 전의 나라, 익숙한 거리의 모습에 이사벨라는 헛숨을 내뱉었다. 잠깐, 내가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지? 안개가 낀 숲속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나둘 명확한 윤곽을 잃어가더니, 급기야는 무엇 하나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분명, 다른 이들과, 던전에

 

 

거짓말.”

 

 

떠오르지 않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낸 것은 누군가의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제 머리카락을 헤집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사벨라는 멍해진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아직 헤츨링이었던 시절, 어렵게 어른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할 수 있던 시절, 처음 사귄 친구의 얼굴이 여느 날과 다르게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슬란?”

 

 

기침과 함께 목을 타고 올라온 뜨거운 피가 옷을 더럽혔다. 최악이다. 이미 3천 년도 더 지난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 날의 기억을 단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항상 저에게 보여주던 미소가 분노와 배신감 뒤에 가려지고, 넘실거리는 살기가 제 몸을 반으로 찢어놓은 상처를 끊임없이 건드렸다. 낯선 고통 속에서 눈물로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익숙한 붉은 빛이 언뜻 보였으나 그녀는 그만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이른 아침부터 눈물과 땀으로 젖은 얼굴로 일어난 이사벨라는, 제 비명에 놀라 달려온 그를 보고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당황하는 그의 모습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이사벨라는 그를 안고 한참 동안 눈물을 토해냈다. 이 사실은 드래곤 일족이 알았다면 평생 놀림거리가 될만한 것이었다. 이건 가족들한테도 말 안 할 거야. 분명 엄청나게 놀리고 제일 먼저 소문내려고 힘쓸 사람들이다. 그녀는 제 앞에 놓인 과일을 씹어먹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울음을 터뜨린 그녀를 보고 한껏 걱정 어린 얼굴을 한 그는 수시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작고 약하지만, 자신을 돌보는 이 인간은, 이렇게나 걱정이 많고 다정하다. 제 입에 넣은 과일의 단맛이 평소보다 더욱 달게 느껴졌다. 입맛이 없다는 그녀에게 과일을 내어준 그는 열심히 과일을 집어 먹는 그녀를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에 대한 걱정이 조금은 줄었는지, 어머니께 아침인사를 하러 다녀오겠다며 그는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아슬란.”

?”

 

 

이사벨라의 부름에 그는 웃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깨끗하고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 아래로 금안이 태양을 품고 있었다. 장차 크게 될 인간이다. 이사벨라는 그의 태양과 같은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내심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상당히 깨끗하고 단정한 얼굴이었지만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드래곤들 사이에서는 흔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이사벨라는 그를 진심으로.

 

 

오늘도 연무장 갈 거지? 조금만 쉬었다가 내려갈게.”

괜찮아. 무리하지 말고 쉬어. 나중에 보자.”

 

 

문을 닫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그녀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게 있던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제 볼을 어찌하지 못하고 베개를 끌어안았다. 두근두근. 인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끌어안은 베개의 뒤쪽에서 울리는 작은 움직임이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 나가, 손가락 끝에까지 닿을 때면 그때의 저릿한 느낌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성년까지도 아직 몇백 년이나 남은 유년. 어린 나이에 벌써 제 형제와 쌍으로 괴짜라는 이름을 날리는 그녀가 인간을 마음에 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직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드래곤 일족에서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헤츨링’. 길어봐야 100년인 인간의 수명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시간을 보낼 드래곤들은 한낮 (유희)’에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는다. 이사벨라도 그 사실을 반쯤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본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

 

 

 

 

아슬란은 타인을 잘 믿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대부분의 높은 계급의 귀족들과 다를 바 없이, 다른 가문으로부터의 암살이라던가, 저택 내의 시종들의 배신이라던가, 이런 것들 따위를 어릴 적부터 겪어왔으니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굉장히 매정하게 대했던 것도, 그녀에게는 그다지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제 몸을 지키기 위해서 독에 내한 내성을 키우고 지식을 쌓았으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기로 검을 잡았다.

이사벨라는 아슬란이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를 때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한없이 다정하고 깔끔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속으로는 남에게 선을 긋는 경계가 심한 인간이라는 것쯤은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이사벨라에게도 그의 마음을 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녀가 누구인가. 그녀가 해내겠다 마음먹은 일 중, 그녀가 해내지 못한 일은 없었다. 지금은 아슬란의 신뢰를 받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그녀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르는 땀을 닦고 있는 아슬란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이사벨라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공간에 넣어놓은 통신구에서 연락이 오고 있었다. 그의 동생, 라피스가 준 것이었다.

 

 

아슬란! 나 잠시 화장실 좀!”

내가 그런 거 일일이 말 안 해도 된다고 했지?!”

 

 

이사벨라의 말에 아슬란이 당황한 얼굴로 크게 대답했다. 당황해서 새빨개진 그의 얼굴을 한바탕 비웃어준 그녀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연무장을 벗어났다. 이사벨라가 일부러 그를 당황하게 만드는 모습은 거의 이 저택의 명물이나 다를 바 없어, 그와 대련을 하고 있던 기사들 사이에서도 흐뭇하게 웃는 얼굴이 떠올라있었다.

연무장을 벗어나자마자 이사벨라는 곧바로 공간이동마법을 이용해 아슬란의 저택에서 벗어났다. 그의 저택이 있는 마을과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 마을의 호수 근처였다. 땅에 발이 닿자마자 이사벨라는 익숙한 얼굴들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들었다.

 

 

라피! 메테!”

, 너 이제 돌아와.”

“…어이, 라피스. 전후 사정도 없이 대뜸 그렇게 말하지 마라니까.”

메테 주제에 나한테 명령하지 마.”

 

 

가차없는 라피스의 말에 메세테리우스는 해탈한 얼굴로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싹수 없는 새끼. 입 밖으로 내놓는 순간 세상과 작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저를 향해 반갑게 달려와 안긴 그의 다른 동생을 꼬옥 안아주었다. . 벨라는 귀여워. 고마워, 벨라. 반가워하는 메세테이루스와 달리, 오랜만에 만난 제 동생이 대뜸 내뱉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벨라는 빵빵하게 볼을 부풀렸다.

 

 

더 놀다 갈래. 아슬란이랑 더 놀고 싶어.”

아버지가 너 찾을 때마다 변명거리 생각하는 것도 일이거든?”

말은 그렇게 해도 정작 변명 생각해주는 건 메테잖아!”

헤츨링 주제에 몰래 유희 나온 게, 누구 덕분이지?”

“…라피스.”

 

 

점점 사나워지는 라피스의 말에 이사벨라는 메세테리우스의 품에 좀 더 파고들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래곤 일족에서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헤츨링, 근 몇 백 년 만에 태어난 이 3남매는 어른들로부터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그녀가 어른들의 눈을 피해 몰래 유희를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곧바로 로드인 아버지께 끌려갔을 거다. 아무리 뛰어나도 그녀는 헤츨링. 일반 성인들이라면 모를까, 로드인 아버지의 눈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상황에서, 이사벨라를 도와준 이는 일족 내에서 유일하게 그녀보다 더한 괴짜이자 천재라고 불리는 제 동생, 라피스 라즐리였다.

 

 

“…그럼 아슬란이 성인 될 때까지만이라도 있으면 안 돼?”

안 돼.”

아니, 라피, 조금 다정하게 말해주면 안 되는 거냐.”

? 내가 언제까지 이 녀석 뒤치다꺼리나 해줘야 하지? 이미 많이 봐줬다고?”

 

 

단호한 부정에 이사벨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버리자, 메세테리우스가 급하게 중재에 나섰다. 둘 다 제멋대로에 당장에 아버지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최소 근신인 행동이긴 하지만, 역시 동생이 시무룩해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라피스와 메세테리우스의 가벼운 말다툼으로 이어지자, 시무룩해져 있는 이사벨라는 입을 삐죽이며 후다닥 자리를 떴다.

 

 

! 이사벨라! 어디 가!!”

라피는 바보야! 라피스 바보!”

 

 

곧바로 이사벨라는 공간이동 마법으로 그 자리를 떴다. 마법을 시전하는 속도로는 라피스와 맞먹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 실력이었기에, 라피스나 메세테리우스가 뭔가 조치를 취하기 전에 장소를 옮길 수 있었다. 라피스나 메세테리우스가 저 때문에 난감해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어린 그녀에게 의 일들은 굉장히 매혹적이었기에 쉽게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첫사랑이 있는 곳이었기에 더더욱.

지금이라면 아슬란의 대련도 끝났을 시간이었다. 대련 다음이 역사 수업이라고 했었지. 지금은 텅 비었을 것이라 생각한 연무장으로 텔레포트한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장실 갔다가, 연무장 들렸다 왔다고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든 그녀는 저를 향하는 노을 빛에 흠칫 몸을 굳혔다.

 

 

“... 아슬란? 대련이 끝난 게…”

“…어떻게 된 거야? 방금, 어디서 나타난 거야?”

 

 

이런. 아슬란의 물음에 이사벨라는 낭패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무장에 혼자 남아 있던 아슬란이 답지 않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땀에 젖어 있는 그의 머리카락과 주변에 넘실거리는 검기를 보면, 혼자 남아 계속 검을 휘두른 것 같았다.

생각이 짧았다. 드래곤이라고 해도 아직 감정에 휩쓸리기 쉬운 나이이긴 했지만, 설마 이런 간단한 예상조차 못할 줄이야. 처음으로 느껴진 당황스러움에 이사벨라는 머리가 굳어가는 느낌이었다. 들켰다. 들켰어. 어떡하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해? 서서히 떨리기 시작하는 제 손을 맞잡은 그녀의 얼굴이 점점 당혹스러운 빛을 띄기 시작하자, 가만히 보고만 있던 아슬란이 단정한 얼굴을 와작 구기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방금 그건 뭐야?”

, 아슬란, 그게 말이야,”

공간이동 마법, 절대 쉬운 거 아니지? 검만 잡은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그럼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내 눈앞에서 시전한 너는 뭐야?”

아슬란, 아슬란, 있잖아.”

왜 나한테 거짓말 한 거야?”

 

 

아슬란의 말에 울상이던 이사벨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항상 저를 향해 따뜻한 빛을 품고 있던 그의 노을이 분노와 배신감을 억누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제게 향하는 차가운 빛에 이사벨라는 목이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야. 너를 속이려던 게 아니었어. 아니야.

타인을 쉽게 믿지 못하는 그의 마음을 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거짓을 고하는 이들을 경멸했고 믿지 않았다. 그렇겠지. 아슬란은 자신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눈물을 흘리던 이들이 뒤에서 얼마든지 자신을 찌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그 사실을 가까이에서 잘 알고 있던 이사벨라는 속이 막히는 느낌에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니야. 너한테 상처를 주려던 게 아니었어.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목구멍을 맴돌았다. 차마 그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것은 실제로, 자신은 그에게 제 정체를 숨겼고 여지까지 속여왔기 때문이었다. 단지,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드래곤들에게는 한낮 꿈이니까. 오랜 수명에서 고작 100년도 안 되는 시간. 잠깐 자고 일어날만한 시간이었으니까, 그동안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이었는지, 안타깝지만 지금에서야 느끼고 있었다. 직접 마주하고 있는 이는 허상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살다가 사라지지 않을 살아있는 인간, 생명체, 타인. 어른들이 꿈에 너무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분노와 배신감으로 물든 그의 노을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네가 남들보다 영리한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렇지만, 아직 성인도 안 된 네가 그런 고위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아슬란?”

애초에 너는, 인간이 맞긴 해? 너는 대체 뭐야?”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이 울 것같이 일그러져 있어, 이사벨라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인간이라고, 나도 같은 인간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 와중, 마음속 한쪽 편에서는 솔직하게 말하고 용서를 구하자, 라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드래곤이 인간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한다고? 그 와중에 종족의 자존심을 챙기려 하는 생각도 동시에 고개를 들어, 그녀의 속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지 못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아슬란은 저가 잡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툭 밀었다. 주춤, 한 두발 뒤로 물러난 그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검을 쥐고 있는 그의 손등에 힘줄이 솟았다.

 

 

“…네가 어느 가문에서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속인 것에는 변함이 없지. 내가 어리석었어. 갈 곳 없는 아이가, 그렇게 특출나게 영리할 때부터 의심했어야 하는 건데.”

아니야, 아니야, 아슬란. 그게,”

 

 

이사벨라의 말을 뒤이은 것은 기침소리였다. 문득 목구멍을 치고 올라온 뜨거운 공기에 이사벨라는 양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것은 처음으로 느껴본 고통이었다.

 

 

“…! …!! ..!”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입에서 생전 처음, 피가 주룩 흘러나왔다.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까지 크게 베인 검상은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비껴갔지만 몸을 반으로 가를 기세로 그어진 상처에서는 울컥 피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허억. 휘청거리는 다리가 몸을 지탱하지 못 하고 바닥으로 무너졌다. 양손으로 찢어진 제 상처를 감싸던 손이 피로 물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연무장의 바닥을 적지 않은 양의 피가 적셨고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인간이었다면 진작에 과다출혈로, 아니, 검상을 입은 시점에서 즉사했을 만한 상처였지만 그녀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았다. 상처를 부여잡고 있던 한쪽 손을 느리게 뻗어,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미안, 미안해, 아슬란…”

네게 상처, 주려던 게 아니었어. 그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간절하게, 절박하게 토해낸 그녀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고작 사과 한마디로 아슬란의 마음이 풀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이것만큼은 들어줬으면 해서, 나는 정말로.

 

 

너를 속이려던 게 아니었어.”

 

낯선 고통 속에서 눈물로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익숙한 붉은빛이 언뜻 보였으나 그녀는 그만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

 

 

 

 

“…벨라! 이사벨라!”

 

 

깜박. 은빛 형체가 눈앞을 어른거렸다.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처럼 시야가 흐릿해,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아슬란? 앞이 잘 안 보여. 왜인지 잘 움직이지 않는 손을 끌어 눈가를 문질렀다. 서서히 시야가 깨끗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동시에 의아함도 들었다. 축축한 손을 멀뚱 올려다보다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에 시선을 옮겼다.

 

 

“…누구? 아슬란은?”

너 무슨 헛소리야? 정신 차려. 아슬란은 누구야?"

 

 

미간을 찌푸린 채 저를 내려다보는 시벨리우스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뭐지. 쟤 누구야. 익숙한 얼굴이지만 좀처럼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은발에 푸른 피부, 큰 귀. 블루 엘프, 지만 다른 종족인데. 누구야, 저거. 한참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자니, 주변에서 다른 이들의 목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왜 그래, 시벨? 벨라는 정신이 들었어?”

“…정신이 들긴 했는데, 아직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다.”

이사벨라 씨, 괜찮습니까?”

 

 

불쑥 튀어나온 두 개의 머리통에 다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익숙한 얼굴들,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 주변을 둘러보자, 천천히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여기, 던전이구나. 아무 말도 없이 누워있는 모습이 걱정스러웠는지 시벨리우스가 느리게 손을 뻗었다. 멀뚱히 보고만 있었더니, 작게 짜증을 내며 그녀의 손을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어렵게 몸을 일으켜 앉은 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 대뜸 눈물을 왈칵 쏟아내기 시작했다. ?! 벨라?! 어이, 왜 그래? 당황한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사벨라는 제 눈물을 멈추지 못 하고 제 손을 눈물로 적셨다.

 

 

어이, 괜찮아? 이제 꿈은 끝이라고.”

“…?”

그래, . 아주 기분 더러운 악몽.”

아니야.”

?”

그건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었어, 그건.”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듯 중얼거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엘퀴네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아무리 그래도 울고 있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그의 착한 심성 때문이었다. 눈물이라도 닦아주려는 생각으로 뻗은 그의 손은 이미 눈물로 흠뻑 젖어버린 그녀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당황해서 도로 손을 뒤로 빼려던 엘퀴네스는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멈칫 몸을 굳혔다.

 

 

라피, 라피스는 어디 있어?”

“…벨라?”

라피.. 메테다들 어디 있어…”

 

 

평소와는 달리, 길 잃은 아이가 붙잡은 것처럼 절박하게 매달리는 그녀의 손길을 차마 떼어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