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 천지해 - 청설, 청설신 )
해가 저문다. 바람이 달려왔다. 꽃이 말을 하고, 구름이 미소 짓는다.
떠있는 몸이 제 말을 듣지 않는다. 신은 옅게 닫은 눈을 떠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끔 꾸는 단순한 꿈. 나열한 문장처럼, 간결한 이미지다. 천천히 어둠으로 삼켜지는 해와 하늘에 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바람은 거세졌다. 꿈은 보고 싶은 장면을 보여준다더니. 여우로의 말은 거짓말이었나. 늘 보고 싶은 장면은,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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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 자각몽 아니야?”
“자각몽이요?”
응. 꿈인 걸 깨닫고 꾸는 꿈이라던데? 신의 이야기를 듣던 토끼 수장, 아묘가 답을 냈다. 옆에서 하늘이 역시 끄덕이며 동의했다. 전할 물건이 있어 잠시 들렸는데 마침 식사시간과 맞물려 함께 자리했다. 아묘가 직접 찧어 만든 떡을 점심삼아 먹으며 꿈 이야기를 풀자,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며 듣던 아묘와 하늘이 신의 꿈 이야기를 풀며 소소하게 담소를 나눴다.
“분명 꿈인 건 알겠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그럼 답답하겠다. 움직일 수 있도록 노력해보는 건?”
대답을 하지 않아도 궁합이 잘 맞는 주고받기를 보여주는 아묘와 하늘이에 신은 미소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움직일 수 있도록 노력해봐라. 가능할까. 자각몽은 그저 이건 꿈이구나. 하고 깨닫기만 할 수 있을 뿐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한다면 이건 꿈에 먹힌 게 아닌가. 신은 아쉬운 눈치만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돌아가야 다음 의뢰를 수행할 수 있다. 밤이 오려면 아직 멀었지만 미리미리 준비해서 손해 보는 건 없지 않은가. 지금은 식사도, 잠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지만 임무는 탈 없이 수행해야 나중에 돌아올 그 사람을 마음 편히 웃으며 바라볼 수 있다.
간혹 꿈과 관련해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꿈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가 하면 누군가는 미래를 보기도 한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꿈을 꾸는 사람도 있는데,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꿈은 볼 수 없는 건가. 부루퉁한 표정을 하며 신은 개의 마을로 돌아왔다.
실종 사건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한 마을의 수장이, 그리고 연인이 사라졌다. 청설이 사라지자 신도, 그의 동생인 청우, 청운도 천계를 수소문하며 행방을 찾아 다녔다. 공식적으로 개의 수장은 청운이 맡고 있어 일족에 혼란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는 공석이 너무 컸다. 신은 청설을 찾기 위해 소식을 빠르게 접하는 달의 일족 원로인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께 들은 소식은 없어진 사람들이 청설만이 아니라는 대답과, 내젓는 고개뿐이었다.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신은 이번 일을 천지해에 의뢰하려했다. 하지만 누가 막기라도 하듯이 시기가 맞아떨어지며 한꺼번에 많은 의뢰가 몰려 들어왔다. 개의 일족 용병 중 몇 없는데다, 그림자들 중에 유일하게 숨어드는 임무에 적합하기 때문일까. 간단히 어느 서신을 빼오거나, 어떤 의뢰는 검을 쓰는 일까지 들어왔었다. 늘 하던 방식대로 일족간의 다툼이 없을 선에서,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직접 걸러 수락했지만, 날이 흐를수록 시선이 따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니, 사실 따라붙는 시선의 주인 같은 건 없다. 스스로가 많이 예민해져있을 뿐. 신은 자신을 다독이며 머리에 두른 띠를 내려 눈을 가렸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물려받은 눈은 밤에는 별자리가 담겨 반짝이기 때문에 임무에 큰 불편을 주었다. 용병 생활을 하며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눈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괜찮아요. 신이 눈은 무척 예뻐요.’
‘하지만 저는 주로 밤에 움직이는데. 눈이 반짝여 방해가 되어요.’
‘그럼 머리띠로 잠깐 가리는 게 어때요?’
좋아하는 사람이 해주는 예쁘다는 칭찬에 금방 풀리고, 또 저를 위한 방안을 내주었다. 신은 그 뒤로 눈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청설을 만날 때면 또렷하게 뜬 눈으로 바라봤다. 가면을 쓴 그의 표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이 뒤로 그리 갑자기 사라질 줄은 몰랐지만.
마을을 다시 나선 신은 두리번거리며 숨을 장소를 찾았다. 가려진 눈은 고개를 들어 이제 달 뒤로 숨어버릴 해에게 인사를 건넨다. 해가 사라지면 꿈과 다르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잠도 깨어 정신이 맑아지니 한결 더 수월하고. 이번 일은 길가에 숨어서 의뢰자의 재산을 가로챈 자를 미행하고, 큰 상해 없이 기절시켜 문서만 가지고 돌아오면 깔끔히 끝낼 수 있다. 돌아가면 바로 옷을 갈아입고 잠들어야지. 신은 가볍게 뛰어올라 나무 위로 올라갔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것보다 피곤함과 서둘러 일을 마치고 싶은 충동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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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처리하고 가져온 문서를 청운에게 맡기고 돌아왔다. 걱정하며 안색을 살피는 청운에게는 괜찮다며 웃으며 돌아왔지만 그의 서재를 나오자 눈꺼풀이 스륵 닫히고,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빠른 걸음으로 돌아온 집은 청소를 하지 않아 엉망이지만 신의 눈에는 오직 바닥에 깔아진 이불만 들어왔다. 대강 옷을 갈아입고, 내던지듯 몸을 던지자 잠이 몰려왔다. 천천히 침식하듯 잠겨 먹히는 정신은 아득하게 들리는 새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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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왔나. 하늘에 뜬 구름의 모양이 이상한 걸 보아 꿈이라 확신했다. 적어도 자신은 구름을 타지 않는 이상 절대 땅에서 발을 떼기 싫어하니까. 구름이 이렇게 가깝다면 발밑으로 고개를 내리지 않는 편이 스스로에게 좋았다. 몸이 굳어있으니 한번 밑을 바라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겠지만. 다리에 감겨진 바람이 뜨겁다고 느낄 때 즈음 신은 아묘의 말이 떠올랐다. 움직일 수 있도록 노력해보아라. 가만 앉아 떡을 먹으며 들었을 때는 어렵다 생각했는데, 움직이고 싶다는 마음을 먹자 거짓말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손가락을 자유롭게 꼼지락 거릴 수 있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자 발도 고개로 편히 돌릴 수 있었다. 움직일 수 있어도 신은 절대 고개를 내려 보지 않았다. 이런 모습에 꿈이 괘씸하기라도 한 건지 뚝하고 신의 몸을 떨어트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어디론가 훅하고 떨어지는 느낌에 눈을 꼭 감고, 살며시 뜨자 보이는 배경은 파란색 잎을 가진 나무가 가득한 숲이었다.
“잎색이 신기하기도 하네.”
호기심을 띄며 나무에게 다가가자 잎의 색이 보라색으로 변했다. 초록색만 보다 푸르고 보라색을 띄는 잎을 보니 어딘가 아파보였다. 마르지도 않고, 누렇게 변한 부분도 없는데 왜 아파보이는 거지. 색이 가진 일반적인 이미지 때문인가. 그보다 저와 비슷한 보라색보다는 청설이 생각나는 푸른색이 은연중에 조금 더 반가웠다. 이마저도 이젠 변하지 않고 보라색이지만. 정말로 꿈은 내가 보고 싶은 장면을 보여주는 게 맞나.
“이런 곳에 귀한 분이 찾아오다니, 오랜만이네요.”
신의 뒤에서 얇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지작거리던 나뭇잎을 놓아주고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았다. 입을 제외하고, 머리에서 발까지 검은 천으로 꽁꽁 감은 상대는 성별의 구분을 뚜렷하게 나누기 힘든 미성을 흘렸다. 반갑다며 유하게 올라간 입은 신의 경계심을 효과적으로 끌어올렸다.
‘이런 곳이라니, 여기는 내 꿈일 텐데?’
“맞아요. 당신 꿈입니다. 하지만 제가 있는 곳까지 찾아오는 분은 드물어요.”
그야, 꿈의 연장선에 걸친 여긴 어지간하면 접근하기 힘드니까요.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했다. 신은 의아한 눈으로 작게 열려 답
하는 입을 바라봤다. 독심술?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건가.
“비슷합니다. 시작의 주인은 당신이지만, 지금은 제가 머무는 장소니까요.”
들려주는 답은 신이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아니,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럴 여유가 부족했다. 머리에 들어오는 내용은 제 꿈이지만 본인 의지는 반영이 되지 않는 꿈 속. 그럼 앞의 이 사람 때문에 원하는 바를 꿈에서 볼 수 없었나?
“제가 잠시 들여다보기는 했지만, 영향이 갔나요?”
미안해라, 누군가를 찾는 거 같아서 들려봤어요. 어쩐지 그리움에 비해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더라. 미안하다며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숙이자 보이는 하늘색 머리카락이 유독 빛났다. 스르륵 부드럽게 떨어지는 머리카락은 결 좋게 흩어졌고, 그 마저도 검은 사람이 다시 숨겼다. 조금 인위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제 머리카락보다, 찾는 상대가 더 궁금하지 않나요?”
천천히 호선을 그리던 입이 딱딱하게 굳더니 이내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천을 벗었다. 아까보인 색보다 더 진한 푸른색 머리카락. 호박색처럼 빛나는 노란 눈, 날카로운 눈동자 모양까지. 신이 찾던 그가 검은 천을 두르고 앞에 서있다.
“모습도. 바꿀 수 있나요?”
“네. 바꿀 수 있습니다. 당신이 찾는 사람이 이 분이 맞으신가요?”
천천히 끄덕이는 신의 눈이 그대로 고정되었다. 절대 보이지 않는 사람. 현실에서도 보이지 않으니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다. 부드럽게 웃어주는 모습이 너무 비슷해서 신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소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그는 얼굴의 주인과 닮은 목소리를 내었다.
“표정이 좋지 않네요. 열심히 찾고 있나봐요.”
“네. 단서도 불명하고, 전혀 못 찾겠어요. 힘들어요.”
“저런. 고개를 들어봐요. 제가 확실한 단서를 드릴 수도 있잖아요?”
숙인 채 가만있던 신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확실한 단서? 신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앞의 그가 미소 지으며 작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곳에 있어요. 원치 않은 불을 내면서요. 힘든가봐요. 그리고 당신과 비슷한 사람을 부르고 있는 거 같아요.
“신. 신이라는 사람이 당신이죠?”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는 소녀를 보며 그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지금 이 아이는 그에 대한 걱정일까, 미안함일까. 왜 미안해하는 거지? 그는 흘러들어오는 신의 생각을 차단했다.
“찾는 일에 더 집중해야겠네요.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아니, 사실 더 보이는 게 있지만. 이건 당신이 감당할 문제가 아니네요. 이 말은 굳이 할 필요 없었다. 어찌됐건 찾는 건 지금 내가 변한 모습의 이 사람이지 않은가. 그는 속으로 삼키며 미소만 지었다. 천계에 움직이는 그림자는 아직 어린 용병이 몰라도 괜찮을 터. 만일 전쟁이 터진다면 그 때 구해도 늦지 않는다. 그저 소중한 사람을 찾아 행복하게 지내라며 속삭이고는 그는 꿈에서 신을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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