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 데스노트 - 멜로x티에라(멜로티에), 카논 ) |
* 앵슷주의
* 멜로 안 나옴 주의
* 멜로티에 사망루트A의 스토리입니다.
띵동.
떨리는 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두어 번 정도의 기계적인 소리가 텅 빈 저녁의 복도를 울렸다. 품에 안고 있는 종이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그녀가 좋아하는 레몬을 잔뜩 사왔다. 이걸로 뭐라도 만들어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녀의 부엌을 내가 사용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도 분명 내가 요리를 하기 전에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집안 청소를 제일 먼저 해야겠지.
“티에라? 안에 있어?”
초인종을 다시 누르면서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분명 이 시간대에는 집에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도 퍼질러 자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아무쪼록 나는 그녀가 외출하기 전에만 도착하면 된다. 외출을 했다가는 또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자기가 모르는 곳에 와있다고 가볍게 웃으며 데리러 와달라는 말 역시 듣지 않을 테니까. 집에 있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티에라가 그러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녀를 오랫동안 봐온 나니까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녀의 사정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려고 했다. 그녀가 빠진 깊은 절망의 늪에서 꺼내줄 수 있는 것은 몇 안 되는 친구인 나니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오, 스텔라.”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문이 열리더니, 힘이 빠진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조금은 멍하고, 어딘가 아득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언제나와 같은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알겠다고 말한 게 바로 어제였는데. 보나마나 오늘 새벽에도 클럽이나 쏘다니다가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화장도 지우지 않고 잠들어 크게 하품을 하는 그녀의 입으로부터 메스꺼운 술 냄새가 풍겼다.
“어서 와, 오늘도 왔네?”
“그리고 넌 오늘도 어딜 돌아다니다가 들어온 거야?”
“내가 어딜 돌아다니던 상관없잖아. 그럴 수도 있지.”
실없이 웃는 티에라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무기력한 아이가 아니었는데. 티에라를 떠올릴 때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분명 그녀의 혈통인 스페인을 떠올리게 하는, 한여름의 태양처럼 열정적이고 뜨거운 그것이었음을 기억한다. 아무리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도, 티에라는 끄덕하지 않았다. 늘 환하게 웃으며 뭐든지 넘겨버리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나는 눈을 들어 여전히 졸린 듯 연신 하품을 하면서 문에 기대어 선 여자를 바라본다. 평소처럼 짙은 색깔로 칠한 아이섀도와 높게 그은 아이라이너가 문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 번져있다. 그녀가 어제 어디에 있었는진, 그것을 보기만 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나는 안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려다보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내 시선을 좇던, 반쯤 감긴 푸른 눈이 거기에 멈춰 선다. 티에라는 빙긋 웃었다.
“오, 물론이지. 그런데 그렇게 깨끗하진 않아.”
“저번 주에 내가 청소해주지 않았어?”
“미안, 스텔라.”
그녀는 중얼거리듯 내게 사과하고는, 다시 힘없이 웃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한 손으로는 종이봉투를 껴안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같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내 손에 이끌려왔다. 그리고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선 나는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놀라 그만 안고 있던 종이봉투를 떨어뜨렸다.
“티에라, 넌 이게 무슨.”
“모르겠어. 나도 일어나보니까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티에라는 나와는 달리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이름 모를 남자가 나체의 상태로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자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봐라. 그 때 느낀 내 충격을 분명 느낄 수 있을 테니.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또 술 마시고 데려온 거야?”
“모르겠어. 기억에 없어.”
고갤 내저으면서 티에라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 깊은 한숨을 내뱉으면서 나는 남자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저기요. 일어나세요.”
그러나 남자는 아무래도 깊은 잠에 들었는지 아무런 답이 없다. 규칙적으로 내뱉은 숨으로부터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구역질을 할 것 같은 걸 애써 참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남자를 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티에라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제 어깨 너머로 흘러내리는 길다란 가운을 여미지도 않고 소파에 기대어 서있을 뿐이었다. 나른해 보이는 표정이 지금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것만 같았다.
“아는 사람이야?”
“오, 아니, 모르는 사람. 아, 어제 만났던가?”
“티에라…….”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티에라는 여전히 빙긋 미소 지은 채 다시금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쯤 되면 질려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그녀가 의지할 사람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는 수 없다. 그녀가 내게 해준 것, 그녀와 나의 사이를 생각해서라도 어느 정도 참을 수 밖에. 나는 남자를 깨우기 위해 계속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티에라는 그러는 나를 그저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아……. 정말이지, 티에라. 이제 좀 작작해.”
남자를 깨워 옷을 입혀 돌려보낸 뒤, 질린 나머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티에라는 미안, 하고 샐쭉 웃었다. 전혀 미안해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우선 그녀가 알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왜 자꾸 이상한 남자를 집으로 데려오는 거야?”
“그러니까 스텔라,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니까.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고 보면 옆에서 자고 있는걸.”
“너 설마 바닥에서 자버렸니?”
내 말에 티에라는 대답 대신에 입고 있던 가운을 들어올려 제 무릎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다 쓸린 무릎을 보면서 나는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뱉어야만 했다. 티에라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실없이 웃는다. 마치 이 상황이 유쾌하다는 것처럼.
“제발, 티에라.”
탄식하듯 말했지만 티에라는 하품을 하면서 쓸린 무릎을 내려다보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짧은 스커트를 못 입고 나가겠네. 아쉽네. 그저께 산 예쁜 미니드레스를 입고 가려고 했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티에라에게 쏘아붙이듯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어딜 가려고. 오늘은 집에 있어. 내가 같이 있어줄 테니까.”
“오, 세상에. 여기가 집? 무슨 소리야. 내가 머물 곳은 이제 없는걸.”
티에라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여기에 와서 한숨을 몇 번 내쉬었는지. 나는 종이봉투를 부엌 카운터에 올려두고, 거실에 너저분하게 흩어진 옷가지들을 주워 올렸다. 티에라는 내가 방금 정리한 소파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입을 열었다.
“참, 스텔라에게 말했던가? 몇 주 전에 조직에서 나왔어.”
“네가 속해있던 그곳?”
티에라는 고갤 끄덕였다.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사람을 죽이는 것도 이제 그들을 위한 짓이 되잖아.”
“그건 잘한 거라고 생각해.”
옷들을 전부 세탁기에 던져 넣고 고갤 끄덕이면서 내가 말하자 티에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오면서 돈을 엄청 많이 받아버렸지 뭐야. 데이비드 말로는 퇴직금이래. 내가 여태까지 죽인 사람들은 겨우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던 걸까.”
나는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원목 바닥에 말라붙은 와인 자국을 걸레로 밀어 닦아내기 시작했다. 잠깐의 침묵 뒤, 티에라는 턱을 괴고서 말했다.
“…그에게 그 정도의 가치는 했던 걸까, 나는.”
아까와는 달리 눈에 띄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는 바닥을 청소하던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만다. 바닥을 보던 눈을 들어 티에라의 얼굴을 살피자, 그녀의 얼굴에는 여태까지 지어 보이던 실없는 미소 대신에 무표정이 들어서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닥을 걸레로 쓸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몬 사왔으니까 뭐 만들어줄게.”
천천히 열은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이 고작이었다. 위로의 말도, 공감의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도 닿지 않는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애초에 나는 이제 티에라의 앞에서 그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 얘기를 하면, 티에라는 마치 깊은 바닷속에 잠긴 것처럼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밀랍인형처럼 그저 멍하니 앉아있기 때문이었다. 얘기를 꺼내자마자 눈물을 보이던 시기는 지난 지 오래였다. 그의 화제가 나오면 티에라의 푸른 두 눈에는 그저 공허함이 감돌았다. 그 눈의 깊은 곳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나조차도.
“스텔라, 또 잊은 건 아니지? 난 단 걸 싫어한다니까.”
티에라는 내 말에 그렇게 대답했다.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이 나를 향해 돌아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부엌으로 향했다.
“모를 리가 있겠니. …그래도 힘들 땐 단 거라도 먹어야 하는 거야.”
“오, 아직도 내가 힘들어 보여?”
“…당연하지.”
사람이 이렇게 변했는데 힘들어 보이지 않을 리가. 그렇게 말하려던 것을 애써 감춘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그녀의 태도는 변하는 것이 없었다. 싱크대에 가득한 더러운 식기들부터 치우는 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가, 역시 다른 걸 먼저 준비해야 할 것 같아 찬장에서 그나마 깨끗한 머그컵을 꺼내어 물로 헹궈냈다. 티에라는 여전히 턱을 괴고 앉은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하는데 영 쉽지가 않네.”
티에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내가 준 잔을 받아들였다. 힐금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
“…이거, 뭐야?”
“숙취에 좋은 생강차. 마셔.”
그 말에 티에라는 우습다는 듯이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오, 어차피 오늘 나가서 또 마실 텐데?”
“오늘은 못 나간다고 했지. 하루 정도는 쉬어야 하는 거야.”
“겨우 술 마시고 노는 건데 쉬어야 해?”
그렇게 말한 티에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단순히 노는 것 이상의 일을 하고 있잖아.”
내 말에 티에라는 웃음을 싹 지우고는 홀연히 내가 준 잔을 받아들이더니, 이내 시선을 떨궜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대신에 잔을 홀짝였다. 나는 티에라가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그릇들을 씻기 위해 싱크대 앞으로 향했다.
“이제 벌써 한 달이네.”
문득 그 소리를 꺼낸 것은 티에라의 쪽이었다. 접시를 닦아내던 나는 손을 멈춘 채 다시 티에라 쪽을 바라보았다. 티에라는 내가 준 잔을 양손으로 받들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벌써 그만큼이나 지났나.”
“……….”
나는 아무런 말없이 설거지를 계속한다. 티에라는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좀 더 내가 빨리 눈치챘더라면 그런 일까지 되지는 않았을까?”
“이미 지난 일이야. 이제 와서 그 때 그랬더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해. 그걸 너도 잘 알고 있잖아.”
티에라는 나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나긴 침묵이 찾아온다. 괜히 티에라를 울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별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분명 네가 이렇게 지내는 걸 멜로도 싫어할 거야.”
“그에게 나 같은 건 상관없을걸?”
단호하고 짤막한 한 마디에 나는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섣불리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힐끗 고갤 돌려 티에라를 보니, 그녀는 어느 샌가 손에 낡은 로켓 팬던트를 들고 있다. 늘 목에 걸고 다니던 것이, 이제는 그녀의 화장대 옆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티에라는 팬던트의 내용물을 열어보지 않고, 그저 체인을 붙잡고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고 있다.
“나는 뭐 하러 그렇게 필사적이었을까, 스텔라?”
티에라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언젠가 이렇게 될 걸 나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오, 세상에.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존재지. 그렇지?”
어깨를 으쓱거리는 티에라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많은 슬픔과 작은 체념이다. 그러나 말하는 내용과는 달리, 그 곳에는 후회의 감정은 한 조각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미 지난 일이잖아, 티에라. 잊어버려.”
“잊어버려, 라……. 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면 좋을 텐데 말이야.”
한숨을 내쉬더니 티에라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윽고 쌓여있던 설거지를 끝낸 나는 젖은 손을 한쪽에 걸린 구겨진 행주에 대충 문질러 닦아내고는 뒤를 돌며 그녀에게 물었다.
“티에라, 뭐 먹을래? 일단 이것저것 사왔는데.”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모습에 나는 질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한숨을 섞으며 말했다.
“방금 전에 차 마셨는데 또 술을 꺼내면 어떡해?”
급히 그녀의 손에서 잔과 병을 뺏었다. 잔에 반쯤 채워져 있던 브랜디가 바닥으로 흩어진다. 방금 전에 청소했는데. 마음 속에서 짜증이 밀려오지만 애써 참는다. 티에라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닐 테니까. 티에라의 푸른 눈동자가 바닥에 흥건히 퍼진 브랜디로 향했다.
“…미안해, 스텔라. 나 때문에.”
“아니야, 괜찮아. 나는 너의 제일 친한 친구잖아, 티에라.”
그렇게 말하며 나는 허리를 숙여 그 진한 꿀색 액체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티에라는 다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깊고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어떻게든 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버리네.”
달칵, 하고 급속제의 무언가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시선을 돌려 티에라의 얼굴을 살핀다. 손바닥만한 로켓 팬던트의 내용물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여전히 잔잔하고 부드러운 색이 비춰지고, 입가에는 은은하고 작은 미소가 어린다.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를 보내줘, 티에라.”
“그건 못하겠어.”
그렇게 즉답한 티에라는 시선을 팬던트에 고정시킨 채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는 그녀를 설득한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똑 같은 말을 내뱉는다.
“형태만이라도 좋아, 티에라. 그를 보내줘. 그럼 너는 분명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이제 그걸 버려. 그건 단순히 빛 바랜 오랜 사진일 뿐이잖아.”
티에라는 내 말에 팬던트의 뚜껑을 닫더니, 그것을 꼭 제 손에 쥔다. 결코 놓지 않겠다고 말이라도 하듯, 붙잡은 손가락에는 유난히 힘이 들어가있었다.
“계속 이렇게 살 거야?”
“……….”
재촉하는 내 말에 티에라는 시선을 내렸다. 대꾸하지 않고,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그녀가 과거에 연연하고 있어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그녀는 계속 그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그것이, 계속 그녀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는 걸.
“살아남은 너라도 잘 살아야지. 안 그래?”
“글쎄, 나는 살아있어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티에라.”
그녀는 또 실없이 웃어 젖혔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티에라는 그의 모든 걸 잊겠답시고 클럽을 전전긍긍해가며 남자들에게 제 몸을 팔았다. 그 돈으로 독한 술을 사 마시고, 비밀리에 대마초를 사다가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동안만이라도 어떻게든 제 슬픈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잠깐 동안의 쾌락에 지나지 않을 뿐. 깨어나고 나면 그가 없는 공허한 현실이 저를 맞이하는 게 싫어서 멈출 수가 없다고 했다. 그것이 저번 주에 내가 그녀를 찾아와 다그쳤을 때, 약에 취해있던 티에라가 흐리멍덩한 목소리로 내뱉던 말이었다.
“그럼 새 일을 찾아보지 않을래?”
그런 주제를 꺼낸 것은, 티에라가 일에 몰두하면 조금 더 자기 자신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티에라는 말없이 내 뒷말을 기다린다. 들어줄 생각인 걸까. 조금의 희망이 생긴 것 같아 나는 얼른 말을 이어나갔다.
“경찰이나 군에서 일하는 건 어때, 티에라? 너는 머리도 좋고, 네 사격 솜씨도 좋으니까.”
“그 녀석이랑 같은 일을 하라고?”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아한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런 티에라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반드시 그 아이를 만나지는 않잖아. 거기에 걔도 분명 이번 일에 대해서,”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티에라는 내 말을 딱 잘라버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던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녀석이, 그가 그런 결말을 맞이할 때까지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는데? 오, 퍽이나 걱정을 하고 있네, 그렇지?”
“티에라.”
화가 섞인 말투에는 비아냥이 섞여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티에라는 눈을 감고 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아, 나도 알고 있어. 그 꼬마의 잘못이 아니란 걸. 나도 알고 있어.”
피식, 저를 자조하는 웃음이 그녀의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알고 있어, 전부 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티에라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낮고 차가운 그 목소리는 그녀의 복잡한 감정을 담은 듯,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필사적이었을까?”
티에라는 다시 손을 들어 제가 꼭 쥐고 있던 팬던트의 뚜껑을 열었다. 떨구고 있는 푸른 눈동자에 비친 오래된 사진 한 장. 두 달 전 그 커다란 사건에 휘말려 죽은 그 남자의 사진이다. 낡아빠져 색이 빠지고 있는 그 사진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금발의 소년이 비쳐져 있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그 남자의 사진. 우리 모두가 어렸을 시절의 사진이다. 본래는 티에라와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는데, 그녀는 그 남자만을 잘라내어 팬던트에 넣어둔 것 같았다.
어린 티에라가 그 사진을 나에게 수줍게 보여주면서 옅은 미소를 짓던 걸 기억하고 있다. 기왕 같이 찍는 사진이니까 그렇게 딱딱한 표정을 짓지 말고 좀 더 웃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내가 사진을 보며 덧붙였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티에라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했던가? 작은 목소리로 자기가 이걸 간직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런 말을 했던 거 같다.
한참 그 사진을 내려다보던 티에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결국 내 손에 들어오지 못하면 여태까지 해온 모든 것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 스텔라? 악착같이 해왔는데 말이야. 웃기지 않아?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어떠한 보상도, 어떠한 희망도 얻지 못했어.”
“하지만 티에라, 너는 멜로와 자주 함께 있었잖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와 밤을 보냈잖아. 분명 멜로가 너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진 않았을 거야.”
그녀를 반박하겠답시고 내뱉은 나의 말에 하, 티에라가 코웃음을 쳤다.
“오,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받아서 내가 기뻤을 거라 생각해?”
티에라의 말투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그는 나랑 거래를 했을 뿐이야. 나는 그를 도와주었고, 그 대가를 받았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그래, 내가 지금 남자들에게 내 밤을 제공하고 돈을 받고 있는 것처럼, 그냥 거래였을 뿐이라고.”
티에라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윽고 자조적인 웃음이 입가에 피어났다. 오늘따라 그녀는 말이 많았다. 어쩌면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꺼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상태가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기에,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역효과가 된 걸까.
“내가 먼저 말했지만 정말이지 비참하기 짝이 없었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어. 아니면 완전히 나를 두고 떠날 것 같았으니까.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얼른 고갤 내저었다.
“아냐, 티에라. 만약 멜로가 너를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너를 그저 도구로만 생각했다면, 그의 죽음이 아닌 너의 죽음이 되었을 거야. 너를 이용했을 거니까. 자기는 숨어있으면 되잖아. 너한테, 모든 걸 다 미뤄뒀을 거야. 나도 멜로가 얼마나 자기 목적에 집착하고 있었는지 알아. 어렸을 때부터 악착같이 노력했던 건 하우스 아이들 모두에게 유명한 얘기였고, 그가 하우스를 나가고 나서도 너에게, 얘기를 많이 들었으니까.”
“…위로해줘서 고마워, 스텔라. 하지만 그게 아니란 걸 나는 알고 있어. 그래,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티에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뚜껑이 열린 팬던트를 그대로 제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소파에 등을 깊게 파묻고 앉은 채, 티에라는 옅은 한숨을 내쉰다. 팔걸이에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곧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부터 안 찾아와도 괜찮아, 스텔라.”
“…티에라.”
“내게 그렇게까지 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스텔라. 네게도 미안한 걸. 너도 너의 생활이 있으니까, 너의 삶이 있고. 너와 나는 친구이긴 하지만, 굳이 네 시간을 쪼개서 날 도와줄 필요는 없어. 그나저나 애인이랑은 잘 되고 있어? 이름이 뭐였지? 앤드류던가?”
그렇게 말하고는 빙긋 잔잔하게 웃었다. 그녀는 억지로 화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우선 그녀의 질문에 답해주기로 했다.
“…내 애인의 이름은 제이콥이야, 티에라. 바로 어제 미국으로 출장을 갔어. 뉴욕이래.”
“오, 그래? 전에도 얘길 들었지만 여전히 바쁘네.”
티에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으면서 별 내용도 없는 얘기를 나에게 건넨다. 내 애인 제이콥에 대한 얘기, 늘 바쁜 그를 헐뜯는 얘기, 자기가 저번에 만났던 남자에 대한 얘기, 어제 샀다는 옷에 대한 얘기. 그런 얘기를 하는 티에라의 얼굴은 억지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차마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애써 감정을 숨기려고 드는 그 얼굴에는 더 이상, 거짓말에 익숙하던 그녀가 남아있지 않았다.
“티에라.”
한참을 듣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음?”
쉴새 없이 말을 하던 티에라는 돌연 내가 말을 걸자 입을 다물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돼. 천천히, 아주 조금씩 나아가면 되는 거야. 그를 잊는 게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에는 분명, 잊을 수 있을 거야.”
“……….”
티에라는 나의 말에 대답 대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서, 다시 팬던트를 꼭 집어 들었다. 마구 놀리던 입을 다문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그대로 굳어버린다. 손도, 몸도, 얼굴까지 굳어서는 티에라치고는 드물게, 무표정을 띄운다.
희미하게 밝혀진 어스름한 불빛 아래에서, 우리는 그저 그렇게 앉아있었다. 나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티에라에게 아무런 말을 건네주지 못했다. 몇 시간이고 그녀의 맞은 편에 말없이 앉아있는 게 고작이었다. 티에라는 그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추억을 곱씹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티에라가 사진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를 보고 있었다.
뉘엿뉘엿 노을 빛이 창문 너머로 스며들고, 나도 기다리다 지쳐 꾸벅꾸벅 졸 때 즈음, 달칵, 하고 팬던트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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