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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2017년 7월호

빛바랜 사진 속 (테니스의 왕자 - 유키무라 세이이치 )



 

빛바랜 사진 속

 


 

( 테니스의 왕자 -  유키무라 세이이치, 유키카네, 하늘새  )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게 남의 결혼사진 보는 일이라던데.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꾹꾹 집어삼킨 키리하라가 흘끔, 유키무라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선배들이 오냐오냐해주는 릿카이(立海) 시절의 막내 키리하라 아카야(切原赤也)라고 해도 저 유키무라 세이이치(幸村精市)에게 그런 불평불만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유키무라에게 입을 벙긋하는 순간 사나다(田)에게 먼저 혼나고 말 것이다.


 "저는 다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안 돼, 아카야. 제대로 봐주지 않으면. 나는 그렇다 치고 아카네가 서운해할걸."

 "..."


 차라리 화를 내줬으면 좋겠다. 서운해한다는 쪽이 훨씬 더 무섭다. 목을 움츠리더니 다시 사진으로 시선을 돌리는 키리하라를 보던 유키무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결혼식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보통의 커플이라면 두 사람이 같이 드레스도 보고 반지도 보고 사진도 보겠지만 신부가 될 세리자와 아카네(芹澤茜)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내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유키무라도 결단코 한가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편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하나부터 열까지 거의 혼자서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결혼사진 정도는 같이 보는 편이 좋을 텐데.


 "부장."

 "응."

 "아카네 선배는 많이 바쁩니까?"

 "그런가 봐."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키리하라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티브이 채널을 돌릴 때마다 반드시 어딘가에서는 세리자와가 등장하는 광고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 정도로 광고를 찍는다는 건 역시 잘 나가는 연예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본인이 입을 드레스 정도는 본인이 정하는 게 좋을 텐데요."


 중학교 시절 함께 테니스를 치던 부원들이 모두 몰려와서 앨범에 넣을 결혼사진을 골라주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야규(柳生)의 말에 이번에는 조금 크게 한숨을 내쉰 유키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네가 골라주는 거면 기뻐,라고는 했지만 역시 평생 한 번 있는 날인데 드레스 정도는 본인이 고르는 게 좋지 않을까.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다. 차가운 물이라도 마시면 좀 괜찮아지려나.

 

 "다녀왔어-"

 "수고했어. 피곤하겠다."

 "죽을 것 같아-"


 드레스 입을 때 고생하지 말라고 강제 다이어트라도 시킬 생각인가 봐. 투덜거리며 구두를 벗어던지는 세리자와에게 코코아를 내밀던 유키무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 내가 목욕하고 나와서 정리할 거니까 신발 그냥 놔둬-"

 "알겠어."


 뱀이 허물이라도 벗는 것처럼 하나하나 옷을 벗으며 욕실로 들어가는 세리자와의 뒷모습에 이번엔 가벼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현관에 제멋대로 던져진 구두를 정리하고, 옷을 주워들어 세탁기에 넣고, 정리해 둔 결혼사진을 갖고 올 때쯤 목욕을 마친 세리자와가 종종걸음으로 거실로 나왔다.


 "바스 타월만 걸치고 나오지 말라니까."

 "미리 좀 보면 어때. 어차피 다음 달부터는 보기 싫어도 실컷 볼 텐데. 아니면 벌써 질렸어?"

 "그런 게 아니라."


 결혼을 약속한 남자라도 세리자와의 눈에는 아직 유키무라가 어린 시절의 윳키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먼 옛날-세리자와의 말로는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 싶으면서도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애매한 감정은 어쩔 수 없다.


 "그거 뭐야?"

 "결혼식 때 영상에 쓸 사진. 오늘 대충 추려놨는데 한 번 볼래?"

 "추렸는데 이렇게 많아? 우리 사진 엄청 찍었구나-"

 "촬영을 여러 번 갔었잖아."

 "으음- 하긴. 미안- 나 때문에."

 "별로 아카네 때문은 아닌데."

 "그치만."


 목을 움츠리는 세리자와의 머리카락에서 채 마르지 않은 물기가 방울져 내렸다. 계획대로라면 늦어도 올봄 식을 올렸겠지만 세리자와의 스케줄을 조정하느라 계속해서 일정이 미뤄지는 바람에 정신 차리고 나니 야외 촬영을 계절별로 한 뒤였다. 실내 촬영도 열흘 전에 갔던 것까지 합치면 세 번째였으니 확실히 사진의 양이 많을 수밖에 없다. 키리하라가 고개를 내저은 것도 내심 이해가 간다.


 "피곤하면 내일 보고."

 "아냐- 지금 볼래."

 "드레스도 몇 개 골라봤는데 같이 보면 어때?"

 "예쁜 걸로 골라줬지?"

 "아카네는 뭘 입어도 예뻐."


 웃으면서 대답하는 유키무라에게 부러 눈을 흘긴 세리자와가 옷을 입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로연 영상에는 웨딩 사진만 들어가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유키무라도 다른 사진들을 찾기 위해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전 앨범 몇 개를 뽑아 들고 나오는데 세리자와는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고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분야가 워낙 달랐기 때문에 서로 일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가끔 아침 방송에 나오는 핀업 영상 같은 걸로 막연히 추측할 뿐이지만 일할 때의 세리자와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진지해진다.


 "마음에 드는 사진은 좀 있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고르기 힘들어- 맘 같아선 다 넣어달라고 하고 싶은데."

 "예전 사진들도 넣어야 되니까 그건 힘들지 않을까?"

 "이거, 어떤 사진을 봐도 세이이치가 다 잘 나왔단 말야."

 "내 얘기였어?"

 "아니, 그치만 하객들이 신랑을 보고 반해버리면 곤란하니까 적당히 골라볼까."


 신부가 너무 팔불출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수 없네-라며 웃는 얼굴에 유키무라도 마주 웃어버렸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소꿉친구다.


 "웨딩 사진 고르기 어려우면 다른 사진부터 골라볼래?"

 "어- 그럴까? 근데 우린 같이 찍은 사진도 많아서-"

 "하긴."


 어쨌든 알게 된지 삼십 년이 가깝다. 이대로라면 아마 가족 외에 평생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될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


 "아- 이 사진 오랜만이야. 갖고 있었어?"


 고등학교 때의 사진을 훑어보고 있는데 소학교 때의 앨범을 팔랑팔랑 넘기던 세리자와가 반가운 목소리로 물어온다. 무슨 사진인가 싶어 돌아보자, 무서울 정도로 커다란 꽃 장식이 달린 머리띠를 한 세리자와가 유키무라의 손을 꼭 잡은 채 활짝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아... 그 사진. 오랜만이다."

 "세상에. 이게 대체 몇 살 때야? 일 학년? 이 학년?"

 "일 학년 때 아닌가?"


 앨범에 넣어놨다고는 해도 세월이 지나며 변질된 건 어쩔 수 없는지 사진은 조금 구겨진 채 색이 바래져 있었다. 그렇지만 유키무라도 세리자와도 소중한 것을 발견한 듯한 그리운 표정을 한 채 사진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정말 굉장한 머리띠네..."


 대체 어디서 산 걸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유키무라에게 세리자와가 웃으면서 말했다.


 "굉장한 거지- 세이이치가 처음으로 용돈 모아서 선물해줬는걸."

 "...그랬나?"

 "뭐야, 기억 못 하는 거야?"

 "이런 걸 파는 데가 동네에 있었던가 싶어서."


 입을 삐죽이는 세리자와를 본 유키무라가 황급히 사진을 집어 들어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당일 아침까지도 여자아이의 생일 선물로는 뭐가 좋을지 굉장히 고민하다가 사러 갔던 기억이 있다.


 "나 그 머리띠 아직 갖고 있는데."

 "...그래?"

 "그럼. 처음 받은 건데 당연하지. 아, 진짜 처음은 유치원 때 받은 종이 개구리긴 한데 그건 좀 다르지."

 "그런 것도 줬었나?"


 전혀 기억에 없다. 같은 유치원을 다녔으니 아마도 종이접기 시간에 접었던 걸 준 것 같지만 비행기나 토끼 같은 것도 아니고 개구리라니. 아무래도 어릴 때의 자신은 꽤 센스가 모자랐던 것 같다.


 "와, 나 이 머리띠 엄청 하고 다녔어. 사진 엄청 찍혔네."


 소학교 저학년 정도가 한계일 것 같은 모양인데도 불구하고 커다란 꽃이 달린 그 머리띠는 고등학교 때의 사진까지도 종종 찍혀있었다. 그렇게 맘에 들었던 걸까.


 "피로연 때 하고 나갈까?"

 "그건 좀..."


 확실히 눈에 띄긴 하겠지만 하객들에게 질문 공세를 받는 건 썩 유쾌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애초에, 지금은 용돈을 모으지 않아도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걸 얼마든지 선물할 수 있을 터였다.


 "더 예쁜 걸로 사줄게."

 "흐-응."


 어쩐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세리자와가 다시 앨범을 넘기기 시작했다. 빛바랜 세피아 색의 사진들이 차례로, 눈앞을 지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