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이 너였다
( 이나즈마 일레븐 - 키도 유우토, 키도라미, 다화 )
빠진 일수만 채워도 한 학기가 될 만큼 불성실하게 다닌 중학교 2학년은 다름아닌 타학교생이 된 너와 동선이 겹쳤다. 학교를 나가지 않으면 거의 네 얼굴을 볼 만큼 너는 성실하게 내 일상 속을 들락거렸다. 전학 간 동료치고 인상이 퍽 깊게 남아서 자잘한 장점부터 단점까지 잊을리가 없는데 너는 그 익숙한 얼굴로 말을 걸고, 이미 알고 있을 게 뻔한 제국의 소식을 내게 다시 묻곤 했다. 너는 결국 제국을 이끌게 되었고 너는 다시 나의 일상이 되었다가, 추억이 되곤 했다.
천장 중앙에 달린 샹들리에 보석에 빛이 튕겨나갔다. 견해는 새롭지만 보완점이 필요한 토론을 하면서 맞춘 눈 사이가 가까워졌다. 자선 파티가 열린 홀 가장자리에 마련된 뷔페를 벗어나 우리는 사람들이 짝을 이뤄 선 홀 가운데에 음악이 시작하기 전, 안부를 묻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인사를 곁들이며 마주보았다.
키도가 손을 내밀었다. 검은 장갑을 낀 라미에의 손이 느릿하게 닿았다. 날개뼈 근처를 감싸듯 키도가 잡자 라미에는 키도의 반대편 어깨를 잡았다. 흥미로운 것을 보듯 라미에는 미소를 지었다. 색소폰 소리가 중심으로 연주가 시작했다. 첫번째 스텝은 키도가 밟았다. 검푸른 드레스 자락이 키도에게 닿았다. 검은 구두와 정장을 차려입은 키도의 모습은 교복을 차려입고 다닐 때와 사뭇 다른 느낌이 났다. 사람들 틈에서 공간을 지켜가면서 발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깍지 껴 잡은 손을 뻗어 팔을 곧게 펼쳤다. 스텝이 엉킬지 모르는 서정적인 부분의 도입부였다. 키도는 말 없이 라미에의 눈을 쳐다보았다. 라미에는 먼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누군가 강권이라도 했는지 녹색 안경이 아니라 시선이 드러나는 눈이었지만 안정적으로 키도의 시선은 왈츠의 일부분이 되었다. 뒤로 물러선 걸음을 라미에가 쫓아 발을 내딛었다. 굽이 있는 검은 구두가 카펫을 사뿐히 밟았다. 라미에의 고상한 눈빛이 키도의 시선과 맞물려 왈츠는 우아하게 선을 자아냈다. 키도는 옆으로 스텝을 옮기면서 라미에가 제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는 걸 눈치챘다. 키도가 팔을 위로 들어올렸다. 푸른 드레스 자락이 휘날리며 검게 물들었다가 차분히 가라앉으며 푸른 빛으로 돌아왔다. 재빨리 돌면서 라미에는 입가를 친절히 올리고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키도는 체스판 위 말을 옮기는 것처럼 신중하게 스텝을 옮겼다. 곡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춤을 추면서 시덥잖은 혹은 재계를 움직이는 이야기를 태연하게 나누기 좋은 은밀한 시간이었다.
키도는 대뜸 인상을 찌푸리면서 라미에의 물러선 스텝을 따라잡았다. 리드를 하는 스텝은 조심스러우면서 복잡한 구간에선 무섭게 따라잡았다. 같은 곡이 반복되었고 아까처럼 턴을 돌아야 할 때, 키도는 라미에의 등을 잡은 팔을 내리지 않았다. 웃음 띈 얼굴로 우아하게 턴을 도는 사람들 사이에서 라미에는 키도의 인상 쓴 얼굴을 보면서 소리없이 웃었다. 어깨를 으쓱일 수 있었다면 으쓱였을 것이다. 특유의 방관적인 여유를 부리면서. 곡의 중심부가 지나자 라미에는 키도의 어깨에서 손을 내려놓았고 키도도 따라 손을 떼었다. 깍지 껴 잡은 손은 그대로였다. 검은 장갑을 잡은 키도의 손이 유난히 환해보였다. 저 미간을 찌푸린 인상이 펴지려면 얼마나 걸릴까. 라미에는 도중에 나가는 사람들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손은 놓지 않았다. 원한다면 키도가 언제든 놓을 수 있을만큼 약하게 잡고 있는 걸 믿고 있었다. 호텔에서 개최된 자선 파티 홀은 뷔페 반대편에 창문 대신 발코니를 만들어 놓았다. 커튼을 걷으며 발코니 안으로 들어간 라미에는 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홀을 등진 채 섰다. 초봄의 공기가 차가웠다. 키도는 라미에가 등을 보이자 그 자리에 멈춰섰다. 손잡기 불편한 자세가 되어 깍지를 풀고 키도의 손을 놓은 라미에의 손을 키도는 붙잡지 않았다. 춤은 끝났다. 다만 라미에의 장갑은 봄 공기가 닿자 금세 차가워졌다.
"구두가 높은 것 같은데."
라미에의 옆에 서서 라미에와 같지만 다른 구석의 하늘을 쳐다보면서 키도가 말했다.
"내 이름에 걸맞는 걸 찾다보니 그렇게 됐어."
태연한 말이 미웠다. 키도는 누그러든 인상이 서운하게 눈빛을 굳혔다. 난간은 장갑을 끼고 잡아도 금방 금속의 차가움이 느껴질 정도로 얼어있었다. 초봄은 녹지 않은 것, 녹으려 들지 않는 것을 찾기 어려운 계절이었다. 라미에는 난간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려 난간에 등을 기대었다. 키도가 하늘을 외면하고 라미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미에는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 자리를 비울거야. 아마, 꽤 오래 내 얼굴 못 볼 걸. 나쁘지 않지?"
중요한 점을 뭉그뜨려 아우르는 라미에의 말투를 키도는 곧잘 명확하게 요점만 잡곤 했다. 업무 공간이 같다고 해서 긴 말보다 서면으로 하는 말이 많았는데. 그 때보다 부족한 건 없었지만 새로 생겨난 것을 키도는 맞딱뜨렸다. 키도의 볼에 봄 공기가 찼다. 장갑도 끼지 않은 손에도 봄 공기는 서늘했다. 발코니 아래로 녹지 않은 눈과 잠깐 스친 난간의 온도가 키도에게 스며들었다.거리감이었다. 우리 사이에 새로 자리 잡은 건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같은 길인 척 걷다 생긴 거리가 앞 뒤가 아니라 옆으로 두 팔을 벌리고 서도 넉넉한 거리가 벌어졌다. 라미에는 장갑을 낀 손을 키도에게 내밀었다. 파티에서 필요한 것은 빠짐없이 들었고 빠짐없이 보았다. 키도는 곧게 선 라미에가 내민 손을 잡았다. 피할 이유가 없는 시선이 눈인사가 되고 둘은 손을 놓았다. 추위 속에 놓은 손이 서늘했다. 라미에는 팔짱을 끼었고 키도는 악수한 손을 바지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제국 학원은 건물 특성 상 환기가 잘 안 되는 구조였다. 성능 좋은 공기 청정기가 거르지 못한 답답한 공기를 들이쉬면서 키도는 서류를 파일철에 꽃고 정리했다. 주먹으로 얼굴 받치고 깜빡 졸았다가 얼굴을 떨어뜨리며 돌아온 정신으로 읽던 서류였다. 간간히 글자는 기억 났지만 중요한 담당 교사의 보고서가 없어 대강 훑고 말았다. 키도는 사무용 의자에서 일어나며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늦은 밤, 새벽 중에 걸려온 전화로 통보받고 호의적으로 수용한 약속이 있었다. 어젯밤 그 전화를 받고 2시간이나 일찍 출근 준비를 마쳤다. 키도는 마저 책상을 정리하곤 총수실에서 나와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 세면대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쳐 매고 안경을 닦아 섰다. 그에 손에는 아까 서류를 넣은 파일철이 들려 있었다. 총수실에서 나올 때 가지고 들고 온 것이었다. 총수의 자가용이 학교 정문을 나섰다. 초저녁, 평소 그가 퇴근하던 시간보다 하늘이 밝았다.
총수의 자가용은 한 레스토랑 주차장에 멈췄다. 하얀 외벽에 고동색 나무와 주황끼가 도는 붉은 지붕이 얻힌 아담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키도는 뒷자석으로 팔을 뻗고 다른 꽃도 없이 리본과 비닐로 장식된 분홍 장미 한 송이를 꺼냈다. 하얀 빛이 은은하게 도는 꽃잎은 다행히 싱싱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면서 나무결이 눈에 익을 정도로 많았던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떠올랐다. 내부는 아담해도 예약을 하지 않은 손님은 받지 않고 한 타임에 한 일행만 받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곳이었다. 키도는 카운터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직원의 안내를 따라 건물 안 쪽으로 향했다. 유리로 된 창을 통해 보이는 주방의 일부와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나무 조각된 천장을 지나면서 키도는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일반 4인용 식탁보다 조금 큰 테이블이 있는 방에 들어갔다. 조화가 아닌 생화와 분간이 안 가는 초록빛 식물들로 장식된 방은 화사했다. 녹이 쓸 듯 물들어가는 낙엽이 눈에 선한 가을의 코트를 입고 여름의 초입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키도는 식탁을 사이로 마주보게 놓인 의자 하나를 꺼내 앉으며 장미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낮, 통화 속 목소리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는 비행기라고 했었다. 약속 시간은 6시였고 키도는 2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너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오는 길일 것이다. 시간에 엄격한 네가 갑작스레 약속은 잡은 것도 처음이지만, 이런 식으로 여유 없는 만남도 오랜 만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일행이 도착했다는 말과 함게 키도를 안내 한 직원이 들어서며 등 뒤로 라미에가 들어왔다. 안경을 벗고 미간 사이를 누르고 있던 키도는 코 주변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끼었다. 직원은 곧 키도가 건넨 자켓을 받아 나섰고 라미에는 키도 앞 빈 의자에 앉았다. 은색 넥타이 핀과 십자 모양의 검푸른 넥타이 말고는 달라진 게 없는 스타일에 키도는 어색함 없이 반가운 기색으로 웃을 수 있었다. 정각 6시. 시간 한 번 정확했다.
"급하게 불러내서 미안해. 네가 좋아하는 보고서가 완성돼서 자랑하고 싶었거든."
키도가 작게 실 없는 웃음을 픽하니 내뱉었다. 그리고 눈은 라미에의 장난끼를 담아 웃는 눈가를 쳐다보면서 장미꽃을 잡아 라미에에게 꽃봉오리를 기울였다.
"네 선물에 비해 내 선물이 너무 초라한 게 아닌가 싶어."
꽃봉오리를 잡고 살며시 눈을 감고 향기를 맡은 라미에는 눈을 뜨곤 의아한 눈빛으로 키도를 보며 검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었다.
"여기서 길러낸 장미야? 오, 이 레스토랑이 꽃을 좋아하긴 하지만 꽃 이벤트까지 준비한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네 독주회가 성황리 끝났다는 말에 누가 사왔어. 누굴 것 같아? 그런 거 잘 알아맞추잖아."
"독주회가 성공적이긴 했나보네. 네가 직접 꽃을 준비해온 걸 보면."
라미에가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키도는 몸을 기울여 꽃에 가까이 제 얼굴을 가져갔다. 라미에가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곤 턱을 괴곤 느긋한 눈으로 키도를 쳐다봤다.
"새벽녘에 전화하고 금방 귀국한 사람치고 피곤한 기색이 없네."
"그럼, 체력 하난 현 제국중 감독만 하니까."
"여섯 달이나 보고서 제출을 미룬 사람치고 꽤 밝은 얼굴이고."
턱을 괸 손가락을 뻗어 볼을 댄 라미에가 웃음을 나지막히 흘렸다. 여섯 달이나 밀렸던가. 그래, 항공 우편이 완송 되고도 두, 아니 세 편이라도 충분히 보낼 수 있던 시간이지. 대뜸 전자 메일로 휴가 중인 교직원에게 보고서를 요구하는 상사도 없지 않아? 키도는 의자 끝에 걸터 앉아 한 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상의도 없이 몇 달씩 이나 휴가를 낸 교사는 어떻고. 게다가 보고서를 직접 받으러 오라니. 불만스러운 눈빛이 키도의 눈가를 장악했다. 그럼에도 라미에는 장미꽃을 토닥이면서 대담하게 제 최고 상사의 말이 끝나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보고서치곤 내용에 근거가 부족해서 질문이 하고 싶었거든.
"내 얼굴 안 보고 싶었어?"
키도가 장미꽃을 고쳐 잡았다. 라미에는 꽃잎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을 차분히 내리며 키도의 손등을 두어번 두드렸다. 키도는 장미꽃을 쥔 손으로 라미에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장미꽃을 건네주었다. 라미에가 키도의 손등을 다섯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이탈리아의 겨울보다 춥진 않을거야."
라미에의 코 끝에 바짝 다가온 키도가 나직히 속삭였다.
"뭐, 믿어볼게. 그리고 편지는 규격에 맞춰서 보내지마. 휴가 내고도 일하긴 싫거든."
키도의 두 어깨를 양 손으로 느슨하게 움켜진 라미에는 고개를 비틀었다. 키도가 라미에의 뺨을 한 손으로 받쳤다. 위태하게 서 있던 장미꽃이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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