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 미래의 너
( 테니스의 왕자님 - 키테 에이시로, 키테누키, 영영 )
그의 고개가 돌아간다. 그러자 다른 고개도 휙 돌아갔다.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찰랑이는 머리카락이 그것을 확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렸을까. '시선을 피해버렸다'. 이것 밖에는 답이 없을 것이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미누키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쳐다보려고 한 건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시선이 자꾸만 그에게 머무르는 것이었다.
'아냐.'
작게 부정해보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미누키는 명백히 키테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노골적으로 쳐다본 건지 결국 시선을 느낀 그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만 시선을 홱 피해버린 것. 하지만 그 행동이 오히려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광고하는 꼴이라는걸 알고 있으려나.
'아니라니까.'
U-17 국가대표간의 훈련 중이었으므로 미누키는 속으로만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두어 번, 그렇게 속으로 이리저리 머리를 털어댄 덕에 잡생각이 사라지며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평소에도 이미지 트레이닝은 꼭 하고 있으므로 이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는 건 미누키에겐 손쉬운 일.
'바보같이 왜 시선을 피한거지.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닌...'
난 당당하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다시 눈을 돌렸다. 절대 그쪽을 쳐다보고 있던 게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당당함도 잠시뿐, 미누키는 다시 눈동자를 스멀스멀 제자리로 데려와야 했다.
'뭘 봅니까?'
분명히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었다. 이번에 고개를 돌렸을 때 키테는 완벽하게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용건이냐는 듯! 그래, 사실 굉장히 띠꺼워 보이는 저게 그의 원래 얼굴이지. 그 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일 때문에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런저런 일이라. 생각해보면 짧은 기간 동안 그와 많은 일이 있었구나. 아마 제대로 말을 나눠본 것이 호주로 오기 전, 혼자 오키나와로 여행을 갔을 때일 것이다. 혼자 훌쩍 떠난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것이었는데, 또 어쩌다 보니 월드컵에서 복식을 함께 하게 되고, 또 며칠 전에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미누키는 화악 하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어깨를 꽉 안던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복식경기 이후로 키테에 대한 인상이 좋은 쪽으로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아니, 정정하겠다. 오키나와 여행 이후로 인사도 안 하는 사이에서 인사 정도는 할 마음이 있는 사이로 바뀐 건 사실이지만, ―분명 키테쪽도 그럴 것이라 미누키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새벽에 굳이 찾아와 위로를 건넬 줄은...그건 절대 상상한 바가 아니었다. 평범한 방식도 아닌 꽉 안아주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어이, 어린이. 집중 안 해?"
몇 년간의 이미지트레이닝으로 쌓고 쌓은 상상력이 쓰잘데기 없이 그 날 밤을 머릿속에 재현하려는 순간, 한 남자의 목소리가 미누키를 현실로 불러 세웠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타네가시마 슈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시선을 맞추고 있는 이 남자는 합숙소에서부터 미누키의 개인 트레이닝을 맡아 지금껏 고생해주고 있는 사람이다. 그제야 미누키는 지금 트레이닝 중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곤 그를 향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이럴 때가 아니지, 중요한 이 시점에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리다니 안될 일이다. 낮은 한숨을 한 번. 이윽고 잡생각을 떨친 얼굴은 진지하고 또 날카로운, 평소의 미누키로 돌아와 있었다. 슈지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알게 된 시간 자체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이렇듯 중간에 집중이 흐트러지는 학생은 아니었는데. 특히 테니스에 있어서는 말이다. 무엇이 어린애 마음을 흔들었는지 그 시선의 자취를 쫓아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지금 두 눈을 밝히고 있는 미누키에게 ‘집중 안 하시냐’라며 핀잔을 들을 게 뻔하므로 그만 두기로 한다.
하루는 빠르게 흘러 저녁이 되었다. 저녁식사자리라 쓰고 그날 트레이닝과 정규 경기에 대한 피드백을 교환하는 자리라고 읽는 시간이 지나, 마침내 국가대표의 공식적 하루 일과가 마무리 되었다.
만, 미누키에게 있어선 그렇지 않았다. 매일 저녁 있는 슈지와의 연습 시합. 합숙소에서부터 하기 시작한 이 훈련은 월드컵에서도 예외는 없었는데.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저녁 시합을 끝낸 참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미누키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코트에 남아있었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앉아서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평소의 버릇처럼 이미지트레이닝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집중이 안돼...'
미누키가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아니라는 의미? 사실 이미지트레이닝이라기 보단 마인드 컨트롤에 더 가까울 것이다. 떠올리기 싫어도, 아무리 테니스와 일과에 집중해보려 해도 어김없이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혼란스러웠다. 부끄럽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하고... 또 궁금했다. 왜 이렇게 머릿속에 가득 차 도통 아무것도 못하게 만드는지. 동시에 그는 왜...
"여전한 체력이네요."
이제 몹쓸 상상력이 목소리까지 생생하게 재연해내나? 아니, 그건 진짜였다. 약간 경직된 폼으로 몸을 돌린다. 있었다, 거기에.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얼굴. 키테는 입구 쪽에 서있다가 미누키와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다가왔다.
"뭐하세요, 이런 밤중에...?"
이 말 저번에도 하지 않았었나? 키테는 대답하지 않고 미누키의 옆쪽에 똑같이 주저앉았다. 생각보다 차가운 바닥의 온도에 그는,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라고 무심코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거짓말 같아요."
"들켰네요. 안 들어오길래 한번 와봤습니다."
곰곰이 그의 말을 곱씹는다. '안 들어오길래'... 그 말은 즉 언제 숙소로 돌아오나 신경 쓰고 있었다는 말인가. 뭐 하러 그런걸 신경 쓰지? 이유는 명백했다. 마음 가득 의아해 하면서도 한 구석에서 답을 분명히 외치고 있었다.
'날 신경 쓰고 있는 거야.'
요 며칠 새 미누키가 일상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괴롭히고 있는 것은 '왜?’ 라는 물음이었다. 분명 키테는 자신을 신경 쓰고 있었다. 시합 중 눈을 다쳐 두려움에 떨 때 밤이 새도록 손을 잡아준 일도, 슬픈 생각조차 들지 않도록 꽉 안아준 일도... 하지만 사실 그게 다였다. 특별히 표정이 누그러진 것도 아니요, 말투가 다정해진 것도 아니요, 티 나게 붙어 다닌 것도 아니요. 언제나처럼 특유의 싸늘한 얼굴, 딱딱하고 차가운 말투, 딱 의식되지 않을 정도의 거리감. 심지어 이렇게 둘이서 대화하는 것도 그 날 밤 이후로 처음이다.
"저한테 무슨 할 말 있는 거 아닙니까?"
다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려던 미누키는 뜬금없는 기습공격에 퍼뜩 정신을 차려야 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키테를 바라본다. 속 마음을 들킨 마냥 당혹감이 가득한 눈은 당최 무슨 말이냐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런 것 같아 보여서요. 자꾸 쳐다보는 게."
"제가요? 아닌데요?"
한껏 부정하는 말이 자신 없이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키테의 한쪽 눈썹이 까딱 하고 올라간다. 발뺌할 생각 하지 말라는 얼굴이다, 명백히. 세상에 그렇게나 쳐다봤단 말인가? 본인이 이렇듯 크게 의식할 정도로? 미누키는 새삼스럽게 티 안 나도록 쳐다보지 못한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며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기습공격에 뒤죽박죽이 된 머리를 정리해야 한다. 침묵, 후에 또 침묵... 마침내 미누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이윽고 천천히, 영원토록 다물고만 있을 것 같았던 입을 열었다.
“사실은…물어볼게 있어요.”
“뭐죠?”
“키테상…왜 그렇게 저를 신경 써주세요?”
키테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던 듯 흐음 하고 고민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잘 모르겠다’ 라고 답했다. 미누키의 미간이 따라서 찌푸려진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예상하지 못한 답이라.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누키를 잠시 바라보던 키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괜히 신경 쓰이네요. 새벽같이 일어나서 나가는 것도 그렇고, 지쳐 보이면 마음이 안 좋기도 하고, 대가 없이 뭔가 자꾸 해주고 싶기도 하고요. 전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게나 거창한 거였어요…?”
키테는 입을 다물고 미누키의 모습을 살폈다. 발목 하며 정강이, 허벅지, 손목, 팔, 몸통까지 눈이 닿는 곳마다 무거운 강화 밴드를 달고 있다. 또 항상 거친 운동을 하는 탓에 파스와 테이핑이 없는 곳이 없는 몸 하며, 공에 스치기라도 한 건지 얼굴엔 냉파스같은 것을 붙이고 있었다. 새삼 이렇게 작은 몸이 성한 곳이 없는 걸 보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찡해지는 듯 하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무심코 미누키에게로 손을 뻗어 냉파스가 붙은 뺨을 살짝 쓸어 내렸다.
“이렇게 매번 다치면 무섭지 않습니까?”
“딱히 늘 있는 일이라… 야구할 땐 더 심하게 다치기도 했는걸요.”
미누키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담담히 답했다.
“전 무섭습니다.”
“키테상이요? 엄청 의외네요.”
“당신이 다칠 까봐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 말 뜻을 이해하기까지, 또 받아들이기까지 한 세월은 걸린 듯 했다. 심지어는 원래 자신이 알던 뜻이 아닌가? 새로운 뜻이 있었던 건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도저히 키테 입에서 나올 거라곤 상상할 수 없는 말이었다.
미누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놀란 얼굴로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반면 키테는 여전히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미누키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건 분명히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묘하게 진지해 보였다.
“다칠 까봐 걱정됩니다.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건…”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더니,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는 약간 곤란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누군가를…좋아한다는 건 정말 이상한 감정이군요.”
“어……”
다시 말을 멈추고 눈을 맞추며 얕은 숨을 한번.
“저랑 사귀어줄래요?”
“…어……”
아니겠지, 아니겠지. 고백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번엔 뒷말을 충분히 예상 가능했기에 설마 설마, 정말로 할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그가 고백을 할 줄 몰랐다. 그저 ‘왜 이렇게 신경 써주냐’ 라고 물었을 뿐인데… 아, 그렇구나. 그 답이 ‘좋아하니까’ 였던 거구나. 그걸 깨달은 순간, 미누키의 머릿속은 멈춰버렸다.
“…좋아요…”
쑥스러운지 목소리가 잔뜩 작아져 있었지만, 확실히 들렸다. 확실히 대답했다, 좋다고. 그러자 이번엔 키테 쪽에서 더 놀란 듯,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그 말은…”
“좋아요…좋아요. 좋아해요, 키테상.”
미누키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그렇게 말했다. 키테에게 하는 말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인정하는 말인가. 둘 중 어느 쪽이든, 항상 싸늘하던 키테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다. 그는 당황한 건지 잠시 아무 말 않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뭐에요…당당하게 말해놓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고백을 한 직후에 무슨 얘기들을 할까. 지금 두 사람은 그저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눈동자 가득 담고 있을 뿐이었다.
“키테상.”
“예?”
“그러면… 그러면 키테상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위로해주겠네요.”
“이젠 위로하는데 이런저런 명분을 갖다 대지 않아도 돼서 좋아졌죠.”
연인이니까, 당연 하겠지. 하지만 대답을 듣는 미누키의 표정은 썩 감동받은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름이 가득한 얼굴.
“그치만 그러면 이제 혼자 삭히는 법을 잊어버리면 어떡해요. 스스로 진정 하지도 못하고 키테상만 찾으면.”
하고, 과거의 미누키가 말했다. 순식간에 가족을 잃고 던져진 낯선 곳에서 혼자 견디고 적응해야 했던. 그래서 그게 익숙했던 과거의 미누키가, 겁이 잔뜩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뭘 걱정하는지 압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젠 혼자 삭힐 일이 없을 테니까요. 언제나 곁에 있겠습니다. 찾으면, 바로 올 수 있도록.”
키테는 담담하게, 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가 그렇게 말하자 미누키는 느낄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걸어왔던 길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미래를 걷게 되었다는 걸, 그리고 그 길에 키테와 함께 서있는 것을.
이제는 웃는다. 문득 고개를 돌리다, 시선의 끝에서 그와 눈이 마주치면 그땐 키테는 웃었다. 따뜻한 햇살이 잿빛 하늘의 갈라진 틈바구니로 쏟아진다.
눈이 부셔, 너무 눈이 부셔서 그저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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